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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7-14 11:24
천재 꽃제비 시인의 두번째 시집「이 나라에도 이제 봄이 오려는가」를 읽고- 류근일
 글쓴이 : 글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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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괴기한 호러(horror) 문학의 소재라는 사실이다


                    류근일 (언론인, 조선일보 주필 역임)



  백이무 시인의 시는 시이기 전에 절규다.
  고발이고 언론이고 현장 르포, 그리고 레지스탕스다.
  그녀가 살았던 세상은 두 종류의 존재로 구성되어 있다. 우상 신과 비인간화 된 인간이 그것이다. 비인간화 된 인간이란 다름 아닌 정치범수용소의 수인(囚人)들이다. 그나마 하늘을 볼 수 있는 수인들은 진짜 수인들의 무고한 가족들이다. 진짜 수인은 하늘이 보이지 않는 땅속 감방의 ‘뼈 있는 지렁이’다.
  그녀는 이들, 인간됨을 박제당한 존재들을 위해 시를 쓴다.
  그녀의 시를 읽으면 북한을 어떤 사회로 규정할 것인가에 대한 명쾌한 답이 보인다. 북한은 사회과학적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괴기한 호러(horror) 문학의 소재라는 사실이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좌파 이데올로기? 혁명적 민족주의? 노동자농민? 주체? 웃기지 말라! 오늘의 북한은 그저 사악한 신이 지배하는 처형장, 고문실, 화형장, 시체실이다. 거기엔 인권은 없고 신권(神權)만 있다.
 
  그녀는 절규한다.
죽은 죄인 시체만 전문 끌어다/ 아무렇게 내던지는 외진 송장 골/ 새로 버린 발가벗긴 여자 시체/ 아, 실오라기 걸치지 못한 채/ 너무 끔찍 하반신 그 곳에/ 말뚝처럼 삽자루 박혀 있다…// 중략 // 아버지 ‘불만 죄’에 연루되어/ 공부하다 끌려온 무고한 가족/ 아직은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한/ 티 없이 순결하고 수집은 소녀// 중략 // 수용소에 들어온 지 열흘도 못돼/ 그 미색에 침 흘리던 보위원 놈/ 간음하려 덤벼들다 반항을 하자/ 뱀 같이 독이 올라 저지른 만행…

  백이무는 그러나 처형장 밖 우리를 위해서도 시를 쓴다. 무지, 무관심, 무감정에 빠지는 우리를 위해서도. 우리 역시 또 다른 의미의 비인간화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척에 있는 처형장이 처형장인지 알지 못하는 무지. 죄 없이 끌려가는 죄인들을 의식조차 하지 않는 무관심, 그리고 삽자루가 박힌 ‘송장 골’ 시신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분노할 줄 모르는 무감정. 그녀의 종(鐘)은 우리를 위해서도 울린다.
  히틀러의 홀로코스트에 전율하는가? 스탈린의 카틴 학살에 경악하는가? 밀로셰비치의 인종청소에 몸을 떠는가? 위선이다. 한반도, 바로 우리 머리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살에는 맹목한 채 먼, 남의 이야기를 떠들지 말라.
  흔히들 ‘한반도의 평화 정착’ ‘그것을 함께 할 북한 정권’ 어쩌고 떠든다. 그러면서 북녘의 처참한 인간상황에 대해서는 눈을 가린다. “어쩔 수 없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 남북대화에 지장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전쟁하자는 거냐?”고 협박도 한다. 부도덕한 이야기다. 메테르니히, 키신저 같은 냉혈적 발상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사악한 우상 신의 공범이 되고 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이런 잔인한 권력의 논리를 거부하는 정신이다. 시 문학은 그 중심에 인간을 놓는다. 
  백이무의 시는 이점에서, 어쭙잖은 사회과학의 권력 숭배에 대한 통렬한 일격이다. 그리고 평화와 통일이란, 북쪽 우상 신의 아우슈비츠로부터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구출해 그들에게 인간 본연의 지위를 회복 시켜주는 일임을 일깨우고 있다.

  백이무는 소망한다. 

추운 겨울 깊어지면 갈수록/ 단박 봄이 그리 멀지 않음을 시사한다// 그 혹한이 뼈 속까지 스밀수록/ 따듯한 봄이 오고 있음을 감촉 한다// 엄동이 왔으니 이제 봄이 더 멀랴?/ 봄은 항상 제일 추운 겨울 뒤에 있으니깐!// 바야흐로/ 각일각/ 조선의 새봄이 다가오고 있다… 

  이 뜨거운 소망을 뭉개는 그 어떤 대화 운운, 그 어떤 평화 운운, 그 어떤 통일 운운도 위선이고 배신이다.
  북한 지배층은 말한다. 자신들의 ‘최고 존엄’을 모독하지 말라고, 그것을 모독하는 한국 언론을 재갈 물리라고. 우리더러 동토의 수용소에 갇힌 수인들을 배신하라는 것이다. 처형장의 시신에 침을 뱉고 교형리 우상 신의 공범이 되라는 것이다.
  우리 안에도 이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평화라고 믿는 정치인, 지식인들이 꽤 있다. 강남좌파가 그들이다. 그들은 그것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을 ‘극단’으로 몰아 부친다. 그러나 예수님도 이럴 때 ‘극단’임을 자임한 래디컬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래서 백이무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백이무와 더불어, 그녀 곁에 서있을 것이다. 그녀와 함께 ‘조선의 새 봄’ ‘이 나라에도 이제 봄이 오려는가’를 읊으면서…
  그녀는 그러나 <다시는 이런 시를 쓰고 싶지 않다>는 시를 남기고 있다. 

스무 몇 살 꽃처녀 고운 손이 만들어낸/ 제가 지은 시들은 왜 이렇게 슬퍼야죠?/ 그리고 왜 이렇게 참혹해야죠?// 시란 원시 가장 아름다운 언어의 집/ 그런 예쁜 집이 모인 궁전이어야 하는데…

  그녀는 아름다운 여인, 우아한 여인의 자화상을 그리고 싶어 한다. 그녀는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의식하고 있다.
  그녀는 본디 그런 아름다운 여인의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만약에, 만약에 말이다, 그녀가 처형장을 목격한 분노한 레지스탕스가 되도록 강제되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다시는 이런 시를 쓰고 싶지 않다>에서 보듯, 그 분노와 원한으로 인해 아름다움을 잃는 일은 없었다. 이것은 그녀의 시보다도 몇 배나 더 귀한 영혼의 승리다. 가열한 고난 속에서도 아름다움의 끊을 놓치지 않는 것이야말로 정말로 지지 않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그녀는 레지스탕스에 가린 탐미주의 시인의 본 얼굴을 엿보인다. 스무 몇 살 꽃처녀의 고운 얼굴을… 
  이젠 그 시를 읽는 우리가 답할 차례다. 그녀의 시를 읽은 우리의 화답은 무엇인가? 거창하고 엄숙한 댓글을 달 생각일랑 하지 말자. 그저 진정성 있는 미소를 보내주면 된다. 그리고 우리의 있을 수 있는 한 방울의 위선이라도 씻어 보이면 된다.
  백이무 시인은 우리에게 많은 선물을 했다.  그녀는 우리가 무엇에 분노하고 무엇을 연민해야 하는지를 상기시켜 주었다.
  우리가 한 조각 심장을 가진 인간임을 멈추지 않는 한, 백이무 시인은 결코 고독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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